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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창 장군 - 인간쓰레기 - 51세 피살

그대 사랑 2019. 8. 14. 17:31

양 력: 1882년 3월 4일 04:00

음/평: 1882년 1월 15일 04:00 남자

 

장종창 장군 - 인간쓰레기 - 51세 피살

시 일 월 년

壬 壬 壬 壬

寅 寅 寅 午

 

辛 庚 己 戊 丁 丙 乙 甲 癸 대운: 순행

亥 戌 酉 申 未 午 巳 辰 卯

81 71 61 51 41 31 21 11 1.9

 

1932년(51세, 丁未대운 壬申년) 9월 3일 총에 맞아 암살당함.

 

별명이 도박을 너무 좋아한다고 "개고기장군"(중국 산동에서는 도박하는 것을 개고기를 먹는다고 합니다), 재산이 얼마인지 모르고 첩이 얼마인지 모르고 부하가 몇이나 되는지 모른다고 "삼부지장군"이라 불리웠던 장종창은 스스로를 "영웅중의 영웅"이라 운운하며, 장작림밑에서 한때는 "산동왕"이 되어 자기 고향인 산동사람들의 등꼴을 골수까지 뽑아먹으며 악명을 떨쳤습니다.


별명이 개고기장군(구육장군), 혼세마왕, 긴다리 장군, 세 가지를 모르는 장군(삼부지장군), 오독(5가지 독)대장군 등으로 잔인한 성격이었음, 또 글을 모른다고 하여 문맹장군이라고도 불렸음, 처첩이 공식적으로만 23여명이 넘었음,

 

고향이 산동성 액현으로, 아버지는 취고수(동네 사또가 행차하면 그 앞에서 깽과리치고 나팔 부는 사람)를 하여 집안이 매우 가난했다고 합니다.


소시적부터 "일진"으로 컸던 그는 자기 동네에서 날건달에 양아치로 살아가던 와중에 신해혁명이 터져 치안이 어려워지자 마을 자위대에 들어갑니다.(말이 자위대이지 지켜주겠다는 명분으로 돈을 뜯어먹는 공인된 조폭집단입니다. 돈 안주면 바로 토비로 변신하죠. 장작림도 이쪽 출신이죠)

 

20대 청년기에는 무뢰한, 깡패, 토비(마적)이었음.

 

1911년 신해혁명 당시 녹림 형제(마적단, 자위대)를 이끌고 산동민군 도독 胡瑛의 휘하에 있다가 상해로 가서 상해도독 진기미의 수하에서 출세를 하게 됨. 여단장과 강소육군 제3사단장까지 진급함.

 

1913년 원세개의 황제선포에 반발한 진기미가 반원전쟁을 일으켰다 패하여 몰락하자 그는 이번에는 북양군벌의 거두였던 풍국장 밑에 들어감.


1916년 봄에 상해로 도주하여 여기서 반원운동을 펼치고 있던 옛상사 진기미한테 부하를 보내 진기미를 암살함. 이 공적을 인정받아 11월에 풍국장의 시종무관장이자 측근이 됨.


1917년 9월, 단기서와 손문간의 남북전쟁이었던 "호법전쟁"이 발발하자 장종창은 강소성 제6혼성여단장이 됩니다. 부하들을 거느리고 강서성으로 진격했지만 단지 양아치일뿐 군사적 재능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는 호남성에서 손문측의 공격에 일패도지하고 완전히 풍지박살이 나서 목숨만 구한 채 도주합니다.


이런 무능함에 상사인 강서독군 진광원이 장종창의 군권을 빼앗고 그의 오합지졸군대를 해산시켜 버린 후 쫓아버립니다. 완전히 쪽박 찬 그는 북경가서 직군파의 보스인 조곤 밑에 들어가려고 하지만 오패부의 반대로 재취업도 실패합니다.

 

1922년 11월 장종창은 만주로 가서 봉천파의 거두인 장작림을 찾아갑니다. 서로 같은 "녹림대학 마적학과"출신이었던 장작림은 흔쾌히 그를 받아들였고 장종창은 새 보스 밑에서 길림군 제3여단장이 되어 반장작림 세력들을 여지없이 분쇄해 버리며 신임을 얻게 됩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많은 패잔병들과 토비들을 흡수하여 자기 세력을 구축하죠. 여기다 적백내전에서 패하여 많은 백군 러시아인들이 중국으로 넘어오는데 이들도 휘하로 받아들여 단숨에 봉천파의 유력자가 됩니다.

 

1924년 장작림과 오패부간의 천하패권 다툼이었던 제2차 봉직전쟁이 발발하자 장종창은 봉천군 제2군 부군장(군장은 이경림)이 되어 선봉에 서서 열하성에서 직군과 피터지게 싸웁니다. 이 전쟁에서 장작림이 승리하여 봉천파의 세력은 북경을 비롯해 화북과 화중, 화남까지 미치게 되었고 전중국의 거의 1/3과 인구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장작림은 이 기회에 남방까지 장악하여 천하를 통일하겠다며 이른바 "선무군"을 편성하는데 장종창은 선무군 제1군 군장으로 임명되어 산동을 거쳐 상해와 남경을 점령하고 이 돈많은 알짜배기 동네에 뿌리를 박습니다.

 

1925년 2월에는 이른바 "소환로(강소성, 안휘성, 산동성)3성토비총사령"에 임명되어 그야말로 대군벌의 반열에 서게 됩니다. 4월에는 산동독판(총독)에 임명됩니다. 한낱 "일진"이자 "양아치"였던 그가 인생의 최대 황금기를 누리던 때였죠.

 

그와 그의 부하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주색잡기에 약탈과 강간, 살인을 일삼으며 재산을 불렸고 도박과 마약에 중독되어 군비를 물쓰듯 씁니다. 그의 군대는 온갖 잡탕들이 섞여 군대가 아니라 그냥 양아치들이 모인 오합지졸에 불과했습니다.


상해와 제남을 비롯해 노동자와 농민들, 공산주의자들의 대규모 민란이 일어나자 그는 총칼로 무차별로 제압하여 민심은 극도로 악화됩니다. 이제는 장작림조차도 장종창을 마음대로 콘트롤 할 수 없게 되었죠.

 

1926년 7월 바로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의 북벌이 시작된다는 것이었죠. 이들의 맹공에 오패부와 손전방의 오합지졸 군대는 여지없이 박살이 납니다. 공동의 적이 나타나자 어제까지의 적이었던 이들이 이제와서 서로 연합해서 북벌군에게 맞서자고 하면서도 정작 제대로 될리가 없었습니다.


1926년 9월 장종창은 오패부의 영역인 보정으로 진격하여 조곤을 쫓아내었고 오패부, 손전방과 대립합니다. 사태가 악화되자 장작림이 나서서 서로 손을 잡아야 장개석의 혁명군과 맞설 수 있다고 설득합니다.

 

1927년 2월 국민혁명군의 동로군을 맡고 있는 이종인, 백숭희의 광서군이 주은래의 무장봉기와 연합하여 장종창-손전방 연합군을 격파하고 상해를 장악합니다. 장종창은 장작림의 후퇴 명령에 따라 잔존부대를 산동으로 후퇴시킵니다.


1927년 6월 8일, 장개석은 장작림에게 항복한다면 동북3성의 통치만은 인정해준다고 제의합니다. 물론 3년전만 해도 천하를 쥐었던 장작림이 이제와서 풋내나는 장개석 밑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죠.

 

1928년 1월 26일부터 북벌군에 대해 총반격하여, 장학량과 양우정이 이끄는 봉군 최강의 제3, 4방면군 50만명이 풍옥상의 제2집단군을 공격해 풍옥상휘하의 손연중군을 대파하였고, 장작상의 제5방면군은 산서성 북쪽의 평형관을 공격해 염석산의 제3집단군을 격파합니다.


북쪽전선에서는 봉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전황을 이끌어 가는데, 문제는 장종창-손전방의 남쪽전선이었습니다. 부패하기만 했지 사이좋게 무능하기 짝이 없는 두 콤비는 부하들도 오합지졸인데다 싸울 의지조차 없었습니다.


장개석이 직접 지휘하는 제1집단군과 뛰어난 전술가인 이종인의 제4집단군을 이들이 상대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었지만 이 두사람은 자기 기반을 지키기 위해 장작림 앞에서 고집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군비와 무기는 좋지만 여타 부대가 지원하기 위해 자기 땅에 들어오는 것은 철저하게 거부합니다. 이것이 장작림 최대의 실수였죠. 장개석은 장강을 넘어 산동으로 진격했고 장종창과 손전방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한방에 아작납니다.

 

1928년 5월 1일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이 함락됩니다. 장작림은 풍옥상과 염석산을 한창 밀어붙이던 중인 장학량의 주력부대를 천진으로 턴하도록 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장학량은 치밀한 계획으로 병력을 철수시켜 봉군의 주력부대를 그런대로 유지하면서 북경과 천진 사이로 철수합니다.


한편, 모든 것을 잃은 채 도주한 장종창은 일본과 결탁해 제남사건을 일으켜 산동을 탈환하려고 하지만 실패합니다.

 

1928년 6월 7일 장작림이 암살되자 장종창은 만주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장학량이 이 쓸모없는 인간이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죠. 게다가 백숭희군의 공격을 받아 남은 잔존부대마저 상실한 채 홀몸으로 일본군함을 타고 대련항으로 도주합니다.

 

1929년에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 그는 다시 일본의 지원을 받아 산동성 동해안에 위치한 항구도시 옌타이를 공격해 상륙을 시도하지만 국민당군의 반격으로 대패당합니다.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망명하죠. 그렇게 일본서 뒹굴거리다 3년 후에 돌아옴니다.


1932년에 고향땅으로 돌아온 그는 이번에는 뜬금없이 "항일하자!"라고 설치고 다닙니다. 물론 알거지되어 돌아온 그의 그런 헛소리에 귀를 기우릴 사람은 없었죠. 게다가 풍옥상 밑에 있다가 장개석쪽에서 산동성 주석이 된 한복구는 그를 눈의 가시처럼 취급합니다.

 

1932년 9월 3일, 그런 쓸쓸한 말로를 지내다 북벌과정에서 장종창의 포로가 되어 총살당한 정금성의 조카이자 한복구의 부하인 정계성이 보스의 명령에 따라 그를 제남역 근처에서 권총으로 쏘아 살해합니다. 피란만장의 인간의 비참한 최후였죠. 그의 나이 51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