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가을의 어느 휴일 박정희, 이병주, 이상진 세사람이 신경의 구시가지에 있는 중국인 거리를 거닐때였다. 이병주가 무슨 마음에서인지 문득 길 거리에 앉은 관상쟁이 앞에 걸음을 멈추는 것이었다. 이병주는 원래 농담도 잘하고, 우스갯소리도 잘했으며, 때론 싱거운 짓도 잘 하는 편이었다. 박정희는 이병주의 그런 짖궂은 짓이 또 발동한 것이려니 속으로 웃으며 따라 멈추었다. 급한 성격인 이상진은 "야 야, 시간이 없는데 무시기 이런감둥, 날래 돌아가자야"하고 함경도말투로 만류하려 들었다.
무료히 앉아 있던 60대로 보이는 관상쟁이는 손님 셋이 한꺼번에, 그것도 군관복차림의 청년이 발걸음을 멈추자 잠시 놀라는 눈 치였다. 그러나 직업적인 끼가 발동했는지 이내 세사람의 얼굴을 제빨리 훑어보더니 웃음으로 반 기는 것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관상쟁이의 시선이 박정희의 얼굴에 닿는 순간 놀라움의 눈 빛을 뿜는 듯 했다. 먼저 이병주가 관상쟁이 영감앞에 놓인 등받이 없는 나무의자에 털썩 주저앉 자, 영감은 한동안 이병주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리곤 한손으로 이병주의 턱을 잡고 이마와 귀, 관자놀이 등을 좌우로 돌려가며 살피는 것이었다.그런 뒤 필묵으 로 종이에 글을 써 가며 무어라고 빠른 말로 설명해댔다. 갓 배우기 시작한 박정희의짧은 만주어 실력으로 선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간도태생인 이병주는 연신 고개를 끄 덕이며 이따금 '쓰'(그렇소), '하오'(좋소)하면서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만주어가 통 하는 이상진도 이따금 소리내어 웃거나, 때로는, "이 영감 벨(별)소릴 다 함둥, 야 그 헛소리 듣 는거 날래 거더치고 가자우"하기도 했다. 박정희는 그러는 이상진의 참견이 궁금하여 영감이 지 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상진은 가소롭다는 듯이 소리없이 웃고 나더니 작은 소리로 중간통역을 해 주었다.
"저 허풍쟁이 영감이 이병주가 6~7년안에 여장(旅長.연대장급) 이 되겠다는군. 아니 자네도 생각해 봐. 본과까지 합치면 앞으로 2년 뒤에야 군관학교를 절업할 꺼이고, 그로부터 4년이면 기껏해야 연장(連長.중대장급)밖에 더 되갔어? 그런데도 저 영감의 말 이 여장이 되는 것은 틀림없는데 이병주가 심한 모함을 받게 되어 사병으로 강등될 위기에 몰릴 가능성이 있으니 언행에 극히 조심하라는 거야. 나 원 저런 허풍은…"
듣고보니 박정희도 이상진과 동감이었다. 앞으로 6~7년이면 잘해야 소교(소령)계급일테고 그렇게 되면 연장밖에 더 될게 없었다. 아무리 전시라 하지만 여장이란 어림없는 소리였다. 박정희가 이런 생각에 잠겨 있 을 때 이병주가 일어서면서 약간 들뜬 소리로 말했다."어이 이 영감 왠간히 맞추는 것 같다야. 상 진이 너도 한번 해 보렴""야, 나는 싫다. 영감탱이 헛소리 들을 만큼 한가하지도 않고. 그만 가자 우""그럼 박정희 자네나 한번 해봐"
"나도 싫다. 모처럼 외출에 관상은 무슨 놈의 관상이야. 어서 가자"셋이서 가볍게 실랑이를 하고 있자, 관상쟁이 영감이 불쑥 일어나더니 가만히 박정희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한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쳐다 보더니 무어라고 중얼거리면서 박정희 의 손을 끌어 의자에 앉히는 것이었다. 그 태도가 뜻밖에 공손했다.
"이 뎔 왜 이래. 난 싫 소"박정희는 엉겹결에 조선말로 거절의 뜻을 밝히면서 짧은 만주어로 "워 첸 메유(나 돈 없어)"를 연발해 보였다. 그런데도 영감은 손을 내저으면서 "첸뿌요(돈 필요없어)"하더니, 연신 가만히 앉 아 있으라는 시늉을 해 보이는 것이었다. 이병주와 이상진도 영감의 돌연한 태도변화에 호기심 이 잔뜩 어린 눈빛으로 영감의 다음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병주에게 했던 것처럼 박정희의 얼굴 요모조모를 한참 살핀뒤, 관상쟁이 영감은 종이에다 다시 글을 쓰며 지껄이기 시작하는 것 이었다.
이상진의 통역을 통해 듣게된 박정희에 대한 관상쟁이 영감의 인상(人相) 곧, 관상평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비록 길거리에 앉아 관상으로 밥을 먹어 왔지만 관상학적으로 이렇게 잘 생긴 얼 굴은 처음 보노라는 것이 영감의 첫 소회였다. 지금까지 40여년간 수만 명의 관상을 보아 왔지만 박정희처럼 성공운세가 얼굴 가득히 차 있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놀라움부터 표했다.
처음 저쪽에서 걸어올 때의 걸음걸이에서부터 그런 느낌이 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얼핏 보아도 하도 좋은 운세의 인 물이어서 호기심이 일던 판에 친구가 발길을 멈추고 앉아 주어 다행이었노라 했다. 가겠다는 사 람을 억지로 불러 앉힌것도 그 까닭이란 설명이었다. 작은 몸집인데도 점잖고, 걸으면서도 한눈 을 팔지 않으며 조금 아래로 보는 듯이 걷는 품이 강한 운기를 지닌 두령운(頭領運)에 틀림없다 는 주장이었다.
또 윗 입술에서 코 밑으로 통하고 있는 세로로 된 줄인, 인중(人中)이 길면서도 윗 입술이 위로 말려 올 라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역시 두령운을 지녔다고 했다. 아울러 코뿌리 옆에서부터 입의 양쪽으 로 내려진 선인 법령(法令)도 폭이 넓고 형상이 좋아 두령운을 뒷받침해 준다는 것이었다.
뿐 만 아니라, 자신이 관상을 보자 했을 때 말로는 거절하면서도 서슴지 않고 눈을 크게 뜨던 것으 로 보아 뜻이 큰 사람임이 분명하며, 눈에 힘이 있어 무엇이든 해낼것 같은데 다만 눈매가 격한 것으로 보아 기분이 사나울 때가 많은 것 같다는 풀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자기절제만 잘 하면 이로울 수도 있다는 부연이었다.약간 네모진 이마로 보아 운세가 뻗어나되 늦게 뻗어날 가능성 이 크며, 평생에 한두번은 생사의 기로에 서서 큰 고생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코뿌리가 뚜렷한 것으로 보아 궁지에 몰릴 경우에도 대개는 구원자가 나타나 위기를 모면하게 될 것이란 설명을 덧붙였다.
"제엔장, 전부 좋은 것 뿐이네. 나쁜 것은 하나도 없소?"성미 급 이상진 이 너무 좋기만 한 점괘에 샘이 나서인지 만주어로 묻는 것이었다."눈의 뒤쪽부분을 처첩궁(妻妾 宮)이라 하는데 그 쪽이 좀 오목한 것으로 보아 배우자와의 인연이 희박하겠소. 보아하니 결혼을 한 듯한데 부부의 금실이 좋지 않고 가정도 원만치 않을 것 같은데, 맞소?"
맞는 말이었다. 박정희는 수긍의 뜻으로 머리를 끄덕인 후, 이상진의 통역을 통해 정작 궁금한 부분을 물어 보았 다."자꾸 두령, 두령하는데, 동네의 골목대장도 두령이고, 소부대의 구대장도 두령 아니오? 도대 체 어느 정도의 두령이 되겠다는 거요?"
이 질문에는 영감으로부터 6~7년 내에 여장(旅長) 이 되겠다는 희망찬 점괘를 들은 이병주도 궁금한 듯 바짝 관심을 보이며 영감의 대답을 기다리 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영감은 그때서야 좀전의 헤설픈 풀이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직업의식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곤 관상쟁이 특유의 작위적인 위엄을 나타내 보이며 말하는 것이었다."뿌 쉐!(不說)"(말 못해!)
그 정도의 만주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던 박정희는 영감이 드디어 복채를 노려 하는 수작임을 대뜸 알아차렸다. 그러면 그렇지, 복채를 울궈낼려고 지금껏 터무니없는 허 풍을 쳤던거야. 말려들지 말아야지. 그러나 영감의 단호한 태도로 보아 혹시 자신이 상대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거나 불신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문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망설이는 기분 이 되어 있는데, 보고 있던 이병주가 참견하고 나섰다."내가 이 친구 몫까지 내지. 자, 영감. 여기 복채 내놨으니 한번 속시원히 말해 보구려" 하며 둘의 복채조로 20전을 탁자위에 내놓았다.
...
이병주가 내 논 20전의 복채를 보고도 관상쟁이 영감은 좀 전의 엄숙한 표정을 풀지 않은채 머리 를 가로저었다. 20전은 당신 몫이고, 저 양반 것은 따로 내어 놓아야 하지 않느냐는 표정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며 박정희는 순간적으로 복권을 뽑는 심리 비슷한 기분이 되어, 애라, 까짓것 심심 풀이 한번 잘 한 셈 치자 하는 생각으로 주머니에서 30전을 꺼내어 탁자위에 놓아 보았다. 사실 만주의 돈 가치로는 이병주의 20전이나 자신의 30전은 길거리의 복채치곤 후한 편이었다.
"자, 영감. 이건 내 몫의 복채니 말 하고 싶으면 해 주고, 싫으면 그만 둬도 돼요"영감이 알아듣든 말든 조선말로 내뱉고 일어설 자 세를 취했다. 그러자 영감은 말뜻을 알겠다는 듯 환한 얼굴이 되며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리 고는 붓을 들어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14자를 써 주었는데 꽤나 달필이었다.
三軍叱咤之上將(삼군질타지상장)
治天下之大頭領(치천하지대두령)
삼군(三軍)이란 육군, 해군, 비행대(공군)를 말하며, 상장(上將)은 만주군의 최고 계급으로 오늘날의 각국 대장계급과 같았다. 만주군의 계급은 군관(장교)의 경우 소위, 중위, 상위(上尉·대위), 소교(少校·소령), 중 교, 상교(上校·대령), 소장, 중장, 상장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삼군을 질타하는 상장'이라 면 오늘날의 합참의장이나 국방부장관 정도의 계급에 오른다는 소리였다.
`치천하지대두령'은 천하를 다스리는 대두령이란 뜻이었는데, `치천하'란 말할것도 없이 `한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이 니, `대두령'과 합쳐 확대해석하면 `일국의 원수(元首)'를 뜻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색안경을 끼고 보자면 이 점괘는 현재의 만주국 황실 자체를 부정하는 불경죄에 해당될만했다. 비록 미래 의 예측이라지만 부의(溥儀)황제가 엄연히 살아있는데 `치천하지대두령'이 나오다니, 대역죄(大逆 罪)를 저지르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일 터였다. 박정희도 뜨끔했지만, 이병주나 이상진도 錚 遮 눈치가 역력했다.
"중국인들 허풍 잘 친다는 소릴 내 여러번 들어왔지만 오늘 같은 이 런 허풍은 듣던중 처음이다. 어이 병주와 상진이. 이 영감 복채 울켜내려는 수단이 보통 넘제? 생 각해 봐라. 군복 입은 우리를 보고 이런 허풍을 치는 것을 보면, 시집 안간 처녀들 앞이면 하나같 이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영부인이 되겠다는 소리일끼고, 장사꾼 앞에서라면 누구에게나 거부(巨 富)가 되겠다는 점괘를 안내놓고 뭐하겠노? 내 말이 맞제?"
너무나 엉뚱한 점괘에 박정희 는 자신이 앞장서 내리까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조금만 정신차리고 들으면 터무니없 는 소리 일색이기도 했다. 일본의 꼭두각시국가인 만주국에서 일계(日系)군관도 아닌 조선인 출 신인 자신이 군의 최고 벼슬에 오른다는 것은 출신성분상 우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사 체제나 정치적 변혁을 전제로 한다해도 그 경우는 중국대륙 현지인에게 우선의 기회가 돌아갈 터였다. 큰 칼 차고 고향에 돌아가, 뻐기는 지서의 순사나, 군수·서장을 굽실거리게만 해도 자신의 일차 적 소망은 달성될 것이었다. 장군만 된다하면 더할 나위 없는 가문의 경사일 것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상장이니 대두령이니 하는 소리는 아무래도 영감이 복채를 더 울켜내기 위한 수작이었 던 것 같았다.
"야, 그렇지만 병주는 기껏해야 여장이 될꺼라 하면설라무네, 정희 너는 상장 입네 대두령입네 하니 그게 좀 수상쩍지 아이깝세?"이상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 며 이의를 제기했다. 병주도 동감인 듯했다."맞아, 저 영감, 사람을 면전에 세워두고 차별하는 점 괘를 내논 것 같지는 않아. 정희 너에겐 나와 다른 무슨 대통할 운세가 있는게 분명해. 여하간 기분좋다. 오늘 한잔 톡톡히 내야 해""술이라면 그런 명분 아니라도 언제든지 사지. 오늘은 특히 공연한 헛소리를 안주삼아 말이야"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박정희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들뜨는 희열을 감출 수 없었다.
출처 : 동기생이 하나도 빠짐없이 관상본일화를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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