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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순자 - 전두환 전 대통령 부인 - 자서전

그대 사랑 2018. 6. 16. 10:01

이순자 (李順子) 전 영부인


출생 1939년 3월 24일 (만 78세), 만주

가족 배우자 전두환, 아들 전재국, 아들 전재용, 아들 전재만, 딸 전효선

학력 연세대학교 대학원  외 2건

경력 1981 제12대 대통령 영부인  외 1건

 

양 력: 1939년 3월 24일 06:00

음/평: 1939년 2월 4일 06:00 여자

 

시 일 월 년

己 庚 丁 己

卯 申 卯 卯

 

丙 乙 甲 癸 壬 辛 庚 己 戊 대운: 순행

子 亥 戌 酉 申 未 午 巳 辰

84 74 64 54 44 34 24 14 4.5

 

대운 시작: 4세 5월 15일

현재 나이: 79 세 (2017년 丁酉년)

현재 대운: 乙

 

이 사주의 출처는 <팔자-윤태현 저술> 책에서 발췌한 것임.

 

1957년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나 의사의 꿈을 포기함.

1958년 1월 24일 아버지의 관사에 드나들던 육군 위관 장교 전두환과 결혼함.

1969년 연희동에 17평의 집을 처음 마련함.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됨. 12월 12일 남편이 하극상으로 권력을 잡음.

1980년 9월 1일 남편이 간선제로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발생.

1981년 3월 3일 남편이 간선제로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82년 장영자 어음사기 사건 발생함.

1983년 명성그룹사건과 영동진흥개발사건이 발생함.

1987년 6월 29일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은 언론에 대국민 사과와 함께 재산 헌납을 발표하고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과 민주정의당 명예총재직을 사퇴하면서 이순자를 대동하고 강원도에 있는 백담사로 내려간 후 11월 29일에는 민주정의당을 탈당했다. 백담사에서 불경을 외우며 은둔생활을 함.


1988년 전두환의 형 전기환이 서울지방검찰청 특수부 검사 홍준표에 의해 비리 혐의로 구속됐다. 동생 전경환은 73억6천만원의 횡령, 새마을신문사의 10억원 탈세, 4억1700만원의 이권 개입 등 7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1989년12월 31일에 국회 증언대에 섰다. 다시 백담사에 돌아간 뒤,

1990년 12월 30일 하산하여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1991년 10월 21일 모친 이봉년 여사(1911년 4월 25일 출생) 사망함.

1995년 11월 16일 노태우 구속 수감됨.


1996년 1월 24일 검찰은 전두환과 관련자 16명을 내란 및 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그는 안양교도소에 수감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1996년 3월부터 공판이 진행이 됐는데, 8월 26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사형을, 12월 16일 서울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96노1892) 각 선고받았음,


1997년 4월 17일에 대법원에서 확정됨.

1997년 12월에 사면됨.

2001년 9월 11일 부친 이규동씨(1911년 12월 23일 출생) 사망함.

2013년 2월 25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함.

2014년 4월 23일 전두환 일가, 16년만에 미납 추징금 약 2천억원 완납계획 발표함.

2017년 3월 25일 회고록 출간함.

 

 

전두환 부부 회고록 출간, 이순자 “사실 우리 내외도 5·18사태의 억울한 희생자”

동아닷컴 디지털뉴스팀 입력 2017-03-25

 

전두환 부부 회고록 출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순자 여사가 12·12사태, 6·29선언 등 현대사 핵심사건을 언급한 자서전을 출간했다. 역사적 평가와 다른 관점이 담겨 논란이 예상된다.

 

이순자 여사는 24일 출판사 자작나무숲을 통해 펴낸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에서 자신들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라는 등의 주장을 폈다.

 

이순자 여사는 최규하 전 대통령이 신군부의 강압으로 퇴진했다는 논란과 관련, “오히려 최 전 대통령이 남편에게 후임이 돼 줄 것을 권유했다”고 주장했다. 또 “남편이 처음에는 고사하다가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당시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갈 지도력을 갖춘 사람은 전 사령관뿐’이라는 최 전 대통령 판단의 진정성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또한 이순자 여사는 1996년 재판 당시 한 스님에게 5·18 희생자 224명의 영가천도(靈駕薦度·망자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 기도를 올려달라고 하면서 “저희 때문에 희생된 분들은 아니지만, 아니 우리 내외도 사실 5·18사태의 억울한 희생자이지만, 그런 명분이 그 큰 슬픔 앞에서 뭐 그리 중요하겠나”라고 말했다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3년 ‘전두환 추징법’을 추진한 것에 대해선 “우리가 존경하고 모셨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따님이 그렇게 했다는 것에 너무 충격을 받았다”고 적었다.


이와 관련, 이순자 여사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존경하고 모셨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따님이 그렇게 했다는 것에 너무 충격을 받았다. 나는 진짜 죽으려고 했다. 이렇게 몰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런 보복 심리도 있었다. 둘째 아들의 이혼한 전처 집까지 가서 돈 될 만한 것을 다 가져갔다. 가져간 것까지는 괜찮지만 그게 비자금과 관계있는 건지 실사는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연애 시절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절교 선언’을 했던 일화도 소개했다. 박봉인 초급 장교 신분에 결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순자는 앞날이 창창한 사람이야. 나같이 무능한 사람 말고 좋은 사람 만나라”고 했다고. 이 여사는 이를 ‘절절한 사랑 고백’으로 받아들여 운명을 맡겼다고 적었다.

 

또 장영자·이철희 부부 사기사건에 이순자 여사의 작은 아버지가 연루, 구속되자 남편을 위해 이혼까지 생각했다고 전했다.

 

한편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은 이날 4월 중 전두환 전 대통령의 회고록도 출간된다고 알렸다. 1200여쪽 분량으로 10·26사태 이후 대통령이 될 때까지 일들을 다룬 1권, 국정 수행을 다룬 2권, 대통령 퇴임 후 삶이 담긴 3권으로 구성됐다. 역시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12·12 쿠데타와 관련 민감한 내용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순자(李順子, 1939년 3월 24일 ~ )는 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을 역임한 전두환의 배우자이다.

 

생애[편집]

 

이순자는 1939년 3월 24일에 만주국 신징에서 아버지 이규동과 어머니 이봉년 사이에서 1남 6녀 중 둘째 딸로 출생하였다. 아버지 이규동은 경상북도 성주 출신으로, 고려시대의 재상 이조년의 후손이다. 선대는 경북 고령과 성주에 세거하였다.[1]

 

장교였던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전전하다가 진해여자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뒤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하여 경기여자중학교와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언니가 요절하여 집안의 장녀 역할을 하였다.[2]

 

1957년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나 의사의 꿈을 포기하고 1958년 아버지의 관사에 드나들던 육군 위관 장교 전두환과 결혼하였다. 이순자는 중2 때부터 “아저씨”라고 불렀던 전두환 생도와 결혼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전두환이 “고생만 시키게 될 것”이라며 결혼을 주저했기 때문이다. 이순자는 1958년 1월 24일 대구 제일예식장에서 전두환과 결혼식을 올렸다. 전두환의 나이는 28살, 이순자는 20살이었다. 이순자 쪽에서 일방적으로 날짜를 잡고 장소를 결정한 후 전두환에게 통보해서 올린 결혼식이다.[2]

 

전두환의 부하 부인들한테 얘기할 때 “인생은 짧다. 군인 부인의 인생은 더 짧다. 그 짧은 동안 남편을 집안일로 골치 아프게 하면 안된다”고 충고하곤 하였다.

 

이순자는 어쩌다 전두환이 외출할 짬이 있을 때 바로 따라나설 수 있도록 한복은 한복대로 버선과 속적삼까지, 양장은 양장대로 스타킹까지 각각 벽에 걸어놓고 있었다고 한다. [2]

 

전두환은 1980년 9월 1일 제11대 대통령으로, 이듬해인 1981년 3월 3일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순자의 나이 41세 때의 일이다. 군대 시절부터 아내를 동반했던 전두환은 공식행사장 어디든 이순자를 대동하였다.

 

80년대는 흑백에서 컬러 텔레비전으로 바뀌는 시대이다. 컬러 TV를 통해 드러난 40대 초반의 젊은 영부인의 화려한 의상은 국민들에게 거만하고 사치스럽게 보였다.

 

취임식 때 신경을 써 입은 당의가 세간의 빈축을 샀고, 해외 순방 때 의상학 교수에게 자문을 받아가며 입은 옷도 역효과가 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순자는 점차 세간의 비판에 무뎌져 갔다고 한다.[2].[3]

 

결혼 직후 친정에 들어와 살던 이순자는 11년 만에 집을 마련하여 친정에 진 빚을 갚고 독립할 수 있었다. 이순자의 재력으로 1969년 연희동에 17평의 집을 처음 마련했는데, 이순자의 억척스러운 생활력은 후에 '연희동의 빨간 바지'라는 별명으로 풍자되기도 했다.

 

남편 전두환의 집권 당시 이순자 본인의 사치스러움과 숙모의 여동생인 장영자 일가의 부정부패 비리가 문제가 되어 사회적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2][4]

 

학력[편집]

진해여자중학교 → 경기여자중학교 졸업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중퇴

비학위 수료[편집]

연세대학교 생활환경대학원 고위여성지도자과정 수료

 


출처 : 사주명리(좋은사람 정모카페)
글쓴이 : 도무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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