魏忠賢
붕당정치가 만든 괴물
중국의 저명한 사학자 陳寅恪은 역사를 읽으면서 同情하라라는 말을 남기는데 역사인물의 당시의 심경과 외재하는 처경을 통해 당시의 격국을 이해하라는 것이다.
이후에는 인성의 선악폭도를 정하지 말고 당시의 역사사실을 다시 이해하라는 것이다.
한시기의 역사혼란을 한사람에 책임지우는 것을 경계하고 충간선악의 평가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충현은 명대후기의 천계제시기의 태감으로 중국고대의 간신의 온갖 모습을 갖춘인물로 나쁜 인물의 전형이다.
후에 사학자들은 명의 멸망은 위충현의 책임으로 보는 이도 있을 정도로 명만력황제가 죽고 명희종 천계시 위충현은 천하미란으로 오연장기를 대륙의 하늘에 남긴 인물로 숭정제즉위시 이미 만회가 어려운 상황이라 한다.
위충현의 집정은 괴이한 것으로 문자도 몰라 문화수준이 낮고 간신이 될 재능마져 없던 인물로 채륜 채경 진회등 유명한 간신들은 대문인으로 중국문화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다.
명대초의 태감인 정화도 하서양의 공적을 남기는데 수만명을 데리고 서변으로 항해한 영도였다.
명태조 주원장은 유언으로 태감들을 중용하지 말고 정사에 관여를 막으려고 문자를 배우지 못하게 한다.
그는 역사의 차감으로 교훈을 받든 것으로 후에 자손들은 사례감을 세우고 각종업무를 맡도록 인장을 맡기고 황제의 구술조서를 작성하기도 하고 특무역할로 모함으로 수많은 이들을 형장으로 보낸다.
인접국에는 사신으로 보내 온갖 구실로 재물을 갈취하고 청류 사대부들을 핍박하게 된다.
선덕제부터는 궁중에 태감을 전문으로 교육하는 학당을 세우고 문자교육을 하여 병필태감을 육성시킨다.
위충현은 더구나 半路출가로 하북 창주의 宿濘縣출신으로 도박전문가로 나이가 중년이 되어 환관이 된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도박빛을 갚으려 거세하고 궁중에 연줄로 온 것이라 하는데 고난의 인생길을
위충현이 권신이 된 것은 24사상 전무후무한 것으로 9천세의 호칭까지 받게된 것으로 번왕의 복장까지 갖추었다는데 황권사회에서 상상이 불가능한 일이다.
명대의 정덕제시 태감 류근도 누리지 못하는데 류근은 후에 3일간 수천점을 도려내는 형을 받고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
류근가에서 황제용 옥대와 황제의 옥새까지 나온 것인데 위충현은 수천명의 의장대사열까지 받은 것으로 전국에 生祠까지 지어져 살아서 공로가 큰 자에 수여되는 것으로 보기 드문 일이다.
위충현의 생사에는 당지의 순무가 관원들과 매일 배례까지 하여 놀라운데 5배3고두까지 한 것이다.
위충현의 생사건립은 전국적인 유행으로 당시 주가의 번왕인 초왕과 원숭환까지도 참여한 것으로 찬위를 능가하는 발호의 상징이다.
당시 천계제도 알고도 말이 없어 매우 기괴한 현상으로 태감으로서는 관료집단을 통솔하는 것은 어려운 것으로 당대의 환관이나 동한말 십상시를 능가한 것으로 내외조간의 경쟁과 투쟁의 양상으로 황제의 위세를 엎은 것이었다.
조조처럼 협천자령제후의 표본인데 대가로서 외조의 문무대신과 강력한 투쟁으로 권세를 행사한 정도였던 것인데 위충현은 궁궐내외를 권경일시로 모두 장악한 것으로 궁밖의 무수한 사대부들이 그에 투탁하여 동림당외에는 천하가 그의 것이었다.
청대 내각수보인 풍전은 시를 써서 위충현을 요순에 비유하는데 조소한 것으로 궁중에는 5호 5표 10아이 40손자등이 정해지는데 모두가 사대부들이었다고 한다.사대부들이 투탁하여 무치를 보이는데 고병겸이란 사대부는 의부로 받드는데 나이가 더많았다 하고 아들에게 조부라 부르게 한다.
병부시랑 장아속은 성을 바꾸기도 할정도여서 놀라울 뿐인데 만명시기의 명대사대부는 특별히 도덕표준이 높고 고상한 시기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데 동림당은 정인군자집단으로 수년간 이러한 현상이 가능했는지 알 수 없다.
배후의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한데 苗逮교수의 庸人治國에는 고대왕조중 환관지화가 가장 큰 왕조는 3개조대로 동한 당조 명조로서 명대의 환관전권은 양조대와 본질상 차이가 큰데 동한의 什常侍와 당대후기의 환관전정의 최대특징은 환관이 직접 황제교체를 하고 궁문을 닫으면 부자행세를 한다.
이점은 명대에도 유사하나 명대환관의 권력정도는 궁중의 2인자로 류근은 조반의심을 받고 성화연간의 환관 汪直은 권경조야로 전횡한다.
송대이후 환관의 발호는 사라지고 황제의 지위를 위협하지는 못하는데 삼강오상과 과거제로 관료집단이 강력해진 것이다.
황제의 가노로서 신임을 받으려 노력하는데 감히 태감의 방종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위충현과 천계제의 관계는 경극인 삼랑교자에 묘사되는데 천계5년 60세의 위충현은 수영을 천계제가 물에 빠지자 수영도 못하는 위충현이 즉시 물에 뛰어든 것으로 보아 소왕과 보호자의 관계였다고 본다.
호주지심이 강렬한 것인데 궁중에서는 고양이역할로 외부에서 권세를 자랑한 것으로 본다.
황제앞에서는 완전한 노예로서 역할을 한 것으로 천계제의 폭망으로 동생인 숭정제가 즉위한후 위충현이 독을 먹일까봐 조심하여 처음에는 몹시 경계를 하였다 한다.
숭정이 즉위후 시탐하는 한편 위충현생사의 계속건립을 용인하나 스스로 중지시키고 반항능력이 사라진다.
총명한 일부신하들이 곧 위충현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직접 그를 겨냥하고 사대부대표로 위충현파인 최정수를 탄핵하고 파직하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숭정제는 그를 살해하지 않고 유배를 명하는데 도중에 사태를 알고 목매어 자살하게 되고 그의 수하들은 모두 체포되고 만다.
명대환관의 발호는 대단하였지만 결국 황권을 넘어서지는 못하는데 결국 태감들은 노재에 불과한 것이다.
이로서 엄당이라는 위충현의 당파는 모두 숙청되는데 숭정제가 엄당의 명단을 만들게 하는데 대학사가 4명 상서7인 총독이 20명인데 숭정제는 문제의 확대를 막으려 숫자를 축소하게 했다 한다.
역사학자들의 통계는 6부상서이상의 관리는 44명으로 문자도 모르고 도박을 일삼던 모리배의 휘하에 사대부들이 이처럼 몰려든 것은 의문이 많다.
이는 천계황제 명희종의 각도에서 보아야 하는데 그의 부친 명광종 태창제는 만력제의 총애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즉위하여 1개월만에 죽고만다.
아들 희종은 겨우 16세로 별안간 황제가 되는데 성격상 결함으로 발육이 늦어 20세가 되어서도 어린이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순박돈후한 호인으로 나무로 가구를 만드는 木匠일에 천부적 소질을 가져 가구만드는 데에 주력한다.
그는 정통적인 황자교육을 받지 못하는데 부친인 태창제가 태자로서의 지위가 흔들려서 마찬가지로 부자가 모두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다.
만력제는 정귀비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평생동안 대신들과 불화로 후반의 30여년간 은둔하고 조정에 나오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래서 천계제는 문자를 몰라 모든 것을 위충현에 위임한 것인데 그와 다정히 놀아준 것이 신임의 원인이라 한다.
천계는 정치훈련도 없고 문화소양이 전혀 없어 대신들앞에 나타나는 것이 불편한 것으로 무서움으로 인해 편한 태감인 위충현을 신뢰하게 된 것이다.
천계제는 자신을 길러준 이선시라는 부황의 총비를 믿고 따르는데 광종이 죽자 대신들이 이선시를 황제와 격리시키고 건천궁을 떠나게 한다.
이를 명대역사에서 3대안이라는 이궁안으로 길러준 양모를 강제로 분리시킨 것으로 사대부들의 횡포이다.
이유는 무칙천같은 여인천하를 막으려 한 것으로 이선시는 황태후가 되길 원한 것으로 두사람은 헤어지길 거부하는데 날마다 같이 해온 것으로 무정한 조치였다.
더구나 천계의 유모인 客씨라는 궁녀는 동림당이 여인의 출신을 이유로 출궁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천계제는 즉위후 유모인 객씨를 황태후의 예로 입궁하게 하는데 동림당의 관료들은 결사반대한 것으로 위충현이 이즈음 객씨와 결탁하여 친밀한 관계가 된다.
궁녀였던 객씨는 출궁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다시 입궁하여 태감인 위충현과 서로 의지하게 된다.
사회경험이 많았던 위충현은 곧 황제와 객씨의 신임을 받게 된 것으로 심복으로 위치를 굳힌다.
그러는 사이에 외조의 대신들은 이를 알지 못한 것으로 동림당의 각도에서 보면 광종이 즉위하면서 조정은 동림당인들이 장악하여 황제를 옹립한 기세가 등등하여 이선시를 축출한 것인데 다른 모든이들을 배척한 것이다.
당시 동림당외의 관리들은 모두 퇴직하는 조치를 내리고 동림당의 청류사대부가 집권한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의 당파와 유사한 것으로 사대부들이 황권을 견제하고 통치의 전면에 나선 것으로 천계3년시에 모든 京官들의 고핵으로 업적평가를 하는데 이부상서이자 동림당의 대로인 조남성이 수백명을 탄핵후 모두 퇴직시켜 천하는 동림당인들이 모두 장악한다.
이들은 도덕적인 기준으로 산동인들의 齊黨을 모두 구축하고 호광의 초당인 강소곤산의 곤당인과 절당 선당들을 모두 붕당으로 몰아 소주를 기반으로 하는 동림당 단독집권시대를 연다.
천계4년에는 동림당의 고가맹진시대를 열어 천하를 석권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는데 후궁에서 한여인이 세력을 만들어 위충현과 함께 굴기한 것이다.
위충현의 각도에서 보면 3-5년사이에 서서히 세력을 모은 위충현은 혼란에 빠진 황제가 아무도 믿지 않는 상태에서 객씨추천으로 병필태감이 되자 정치경험이 전혀 없는 위충현은 동림당에 가입한다.
위충현은 시정지혜를 가져 총명함을 드러내어 책략으로 동림당에 든후 복직하여 동림당의 대로가 된 조남성에게 뇌물을 보내 환심을 산다.
그런데 조남성은 예물을 거절하는데 위충현은 모욕을 당한후 복수를 결심하고 지식인 서생들로 도덕군자를 표방한 동림당인들은 자신들의 주장만을 최고로 하여 문생들로 연합한 취약한 구조였다.
그러한 도덕지상주의에 혐오를 느낀 반대자들이 황제신변의 위충현에 몰려들기 시작하고 주응추를 중심으로 동림당과 연합을 도모하나 무참하게 거절된후 음모가 시작된다.
제당 초당 절당 선당등이 모두 엄당을 형성하기 시작하여 그중 완대성은 남명사에서 주각으로 등장하는 인물로 안휘 동성파로 동림당인의 재자인데 대희곡가이기도 하다.
그는 동림당의 영수격인 左光斗의 문생으로 동림당의 정쟁속에 희롱을 당한뒤 위충현에 접근하여 탁주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 동림당의 기밀을 털어놓고 만다.
고대의 당이란 의미는 黨同伐異로 좋은 의미가 아닌데 위충현은 동림당의 모든 조직과 약점을 고밀한 것이다.
위충현은 정치경험의 부족으로 동림당과 대결상대가 되지 않았으나 이후 동림당의 분쇄에 착수한 것으로 완대성 주응추 최정수등과 일보씩 전진하는 방식으로 동림당을 해체시키고 만다.
정치경험이 없던 위충현의 간계로 東林黨은 점차 붕괴되고 천계4년에 동림당은 이를 알고 양련으로 하여 위충현을 24개의 죄상으로 탄핵하기에 이르고 환관인 위충현을 경시한 것으로 황제는 자신의 고립을 획책하는 것이라 분노한다.
이로서 힘을 얻은 위충현의 반격은 당연한 일로 동림영수 고반룡부터 제거하고 조남성 양련 좌광두등이 엄형과 유배에 처해진다.
이들은 처참하게 죽어가는데 머리에 철근이 박히는등 滿懷仇恨의 복수가 계속된다.
무식한 이들의 처절한 복수로 동림당에 박해후 위충현에 투탁한 반대파들에 의한 복수이다.
동림당과 반대편에 선 역시 사대부들의 복수로 조선시대 당쟁과 유사한 형태의 복수와 정변극이 일어나 상대방이 숨쉴기회도 주지 않는 대반격이 이루어진 것이다.
엄당은 東林點將錄을 펴내 동림당인들을 모두 기록한 책으로 죄상을 모두 기록하여 시비곡절은 무시된다.
또한 三朝要典을 펴내 3대안과 죄상을 엮은 역사서로 홍안 정격안 이궁안을 자신들의 각도에서 서술한 것으로 동림당을 모두 부정하고 악인붕당으로 소인들로 묘사한다.
이전적은 청대 사고전서편찬시에 금서로 훼멸되어 잔본만 남아 있는데 당시 천하에 간행배포되
동림당의 핵심은 유가적 표준으로 정확한 정치와 고상한 도덕기준인데 엄당은 공맹을 부정하다보니 위충현을 공맹대신에 추종하기로 한 것으로 대단히 희극적으로 지식인 서생들의 분노이자 역설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위충현에 대한 위조 조신 선양운동이 일어난 것으로 생사를 세운 것은 요순에 비유된 것으로 황제는 아니어서 구천세라 힌다.
위충현은 요순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요수이 비유된 것인데 동림당에 항거하던 사대부들의 설분의 표현이었다.
위충현에 모자를 하나씩 씌우다보니 생사를 만들고 성인의 형상이 되고 만 것으로 동림당의 복귀를 원천봉쇄하려는 분노와 한의 표시이다.
이는 자신들의 집정의 합법성의 표상으로 당시의 난상은 본질적으로 당쟁에서 기인한 것으로 동림당의 도덕고상은 높으나 당시의 정치격국상 엄당의 동림당공격구실은 태감과의 결교로 동림당인들은 병필태감인 왕안과 결교로 집정했던 것에 대한 복수였다,
당시 외조대신과 내조태감간의 관계가 정치격국을 좌우하여 만력초년의 장거정과 궁중태감인 풍보는 좋은 관계로 내외조가 결탁하여 內外相維로 만력초의 중흥국면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내외조결교는 큰 문제가 아닌데 엄당이 동림당을 공격하려는 구실로 당재의 원한이 이러한 황당한 상황에 도달한 것이다.
엄당은 위충현의 시정잡배의 방법으로 동림당의 위선에 이용한 것으로 정치판단능력이 없는 위충현은 인간으로서의 底線을 돌파해준 것이다.
드디어 두사람의 관리가 생사건립시 서로 보고하나 보고의 선후로 승관과 파직이 결정된 것으로 서로 다투어 충성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처경에 이르러 국가의 체계는 무너지기 시작한 것으로 사학자들이 위충현에 명의 멸망책임을 부여한 이유이다.
하나의 정치체계는 절대로 도덕시비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핵심원칙에 불과한 것으로 좋은 것이다.
그러나 도덕의 응용은 자신의 요구시 명분일뿐으로 다른 사람에 보여주는 것으로 도덕의 본질은 변화되고 만다.
도덕으로 인해 부도덕한 정치로 변질되는 예는 도덕과 시비를 말하는데 나의 도덕표준에 부합하지 않는 붕당시 타협을 상실하고 가능성마져 사라지면 시비도 사라지고 만다.
시비로 시작하면 마지막에 시비의 결실도 없는데 도덕정치는 결국 처참하고 황당한 국면에 들고 만다.
만명시 동림당과 위충현의 엄당간의 투쟁은 천추후대의 경험인 도덕시비로 시작하면 타협이 사라져 정치는 파국으로 치닫는다는 교훈을 남겨준다.
타협은 시비입장의 정치가 아닌 좋은 정치를 가져다 준다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의 정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데 어디로 갈것인지는 자명한 일로 이자들에 국가의 운명을 계속 맡겨야 하는지를 숙고해야 할 시기이다.[출처] 중국사인물전(114)위충현과 동림당|작성자 박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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